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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쩝/잡담

최근 읽은 비개발 도서들 짧은 리뷰(2)

 

니체의 삶
수 프리도 저
3.0/5.0

형이상학적 가정은 자기기만의 열렬한 오류이다. 그러나 니체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세계의 존재가 증명된다 해도 그런 지식은 가장 쓸모없는 지식이 될 것이다. 조난 위기에 처해있는 선원에게 물의 화학적 구성이 쓸모없듯이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쓸모없는 것이다.
(291p)

“힘의 세계는 쇠퇴를 겪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한의 시간 속에서 점점 약해져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이다. 힘의 세계는 어떤 중단도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중단에 도달했을 것이고, 존재의 시계가 멈추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든지 간에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고,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도달했을 것이다. 이 순간을 붙들어라. 왜냐하면, 이 순간은 이미 몇 번이고 존재했고, 지금처럼 배분된 모든 힘을 다해 지금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은 태어난 순간과 아이였던 순간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대여! 그대의 모든 삶은 모래시계처럼 계속 뒤집힐 것이고, 그 사이에 있는 어마어마한 1분의 시간이 계속 끝날 것이다.”
(320p)

니체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려면 영원회귀론을 사랑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이는 미신적인, 점성술 같은 수동적 사고를 수용하라거나 동양의 숙명론에 기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되려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성향이 있다면, 그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할 것이고, 이는 반복될 것이다. 만약 삶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긴 선이고, 인간이 이 선의 어느 한 지점에 있다면, 그가 거기 있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따라서 이성이 있는 인간은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순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373p)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열광적으로 환호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 이론을 뒤집는 것이다. “삶, 그것은 자연과는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삶은 평가하고, 선택하고, 불공평하고, 제한하고,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방면에 의심을 싹을 심었던 니체는 위험한 철학자는 진실에 관한 생각만큼 거짓에 관한 생각에서도 흥미로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왜 다양한 관점에서 진실을 조사하지 않는가? 가령, 왜 개구리의 관점에서는 조사하지 않는가?

“연민은 퇴폐적이고 허무주의에 대한 연습이다. 그것은 삶을 부정하고, 사람들을 무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무는 ‘무’로 불리지 않는다. 대개 ‘내세’나 신, ‘진정한 삶’ 혹은 해탈이나 구원으로 불린다. 그것을 알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하게도 연민은 이따금 몰아내야하는 위험한 병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은 설사제였다.”
(507p)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당원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 정당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서 반대당으로 너무 빨리 가버리기 때문이다.”
(639p)

“국가가 하는 모든 말은 거짓말이고, 국가가 가진 모든 것은 훔친 것이다.”
(642p)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저
4.0/5.0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성생활의 역사가 있는 편이 바람직하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것은 복잡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성생활 역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을 차거나 그 사람에게 채였다는 뜻이었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65p)

에릭의 견해는 대담했지만, 은행 동료들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위대한 작품이라고 주장했으므로, 앨리스는 내내 하품했던 걸 떠올리면서도 별말을 못 하다가, 마침내 견해를 묻는 질문을 받자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더구나 2막이 시작되자, 그녀는 지루하지 않았고 실제로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극장을 나설 때 그녀는 베케트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작가이며,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 봐야겠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89p)

에릭이 감상적이지 않은 것은 논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잔한 상황이 그 남자의 내면을 흔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아픈 사람이나 무기력한 사람, 다리가 하나뿐인 장애인, 절룩이는 오리, 불행한 연인들, 우는 아이,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를 보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면 거의 망설임 없이 빈정거렸다. 그 남자의 그런 태도가 암시하는 것은, 그러한 존재들이 대표하는, 소름 끼치는 허약함에 대해 그 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126p)

식사 중의 대화에 조용한 사람이 끼어들면, 그 침묵이 천천히 부지불식간에 대화하던 사람들 모두를 초조하게 만든다. 조간신문에서 본 내용을 표절해서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여자는 문득 말없는 사람의 시무룩한 눈길을 받으면, 사정없이 평가당하고 발가벗겨지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 침묵은 내가 아무거도 모르고서 떠벌린다는 걸 눈치 챘다는 뜻일까?’ 또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그가 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지성적으로 보이는 지름길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라는 불행한 격언이 들어맞는다는 증거다.
(187p)

사람을 괴롭히는 글은 명료하게 술술 읽히는 글보다 왠지 그럴듯하고 더 심오하고 더 참되게 받아들여진다. 하이데거나 후설에게 빠진, 예민한 독자는 ‘이 글은 정말 심오하구나.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걸 보면 나보다 똑똑하구나. 이해하기 어렵다면, 틀림없이 이해할 만한 가치가 더 클거야’라고 생각한다. 책을 내던지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말하지 않고.
(189p)

그 남자가 곧잘 무심해지거나 딴청을 부리거나 앨리스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만한 애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감상에 뜨악해서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고, 상대의 애정에 받아들이기 힘든 역겨움을 경험했다.
(...)
그 남자는 무방비적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방식이 두려웠다. 그 남자는 애정을 받는 것이 거북해서, 사무실에 가서야 앨리스에 대한 감정을 끄집어내 생각했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는 감정 표현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상냥함에 화답할 시간이 필요했다. 수화기를 잡고 있을 때면 혀가 굳어서, 대답할 말을 미리 적어놔야 하는 사람처럼.
(194p)

“당신이 오렌지를 까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라고 에릭이 말하자, 그녀는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음 지었다. ‘내가’ 관련된 일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중에서 ‘그녀가 오렌지를 까는 모습’을 집어내다니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들었고, 그럴듯하긴 해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미사여구보다 훨씬 더 마음을 울렸다.
(215p)

그녀는 그 남자의 기분이 어떤지,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물어댔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요구를 했다. 한가하면 그 남자도 응해주고 싶었겠지만, 앨리스는 유혹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데 익숙한 남자 관객에게 먼저 섹스를 걸어 오는 올랭피아 같았다. 그 남자는 그녀가 꼬치꼬치 캐묻고 요구가 많다고 생각했다. 또 좀 두렵기도 했다. 그 남자는 껍질 속으로 피하려 했고, 아무 대답도 하기 싫고, 가능하면 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위험스럽게도 앨리스가 자신보다 성숙하고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이 좀 더 밝아지면, 그 남자가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을.
(276p)

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 집안의 특징이 뒤섞여 구성된다. 본인은 이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집합을 정상 상태로 여긴다.
(292p)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우리에게 적당한 자아상을 반사시켜주는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해서. 에릭은 앨리스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가? 그는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는가? 모든 게 머릿속 생각일 뿐인지 실제로도 그런지 몰즤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남자와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앨리스는 돈을 함부로 쓰고, 지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데 매달리고, 타인을 귀찮게 하는 이타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였다.
에릭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 그녀 스스로 느끼는 바가 그러했다.
(313p)

행복은 배타적이지만 불행은 끌어안는다. ∴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표정이 아니라 불행한 표정을 짓고, 명량함에 수반되는 독립심,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피할 일이다.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만족한 표정에 함유된 경쟁심을 피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30p)

관계란 스스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잔혹한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정식으로 나타냈을 때, 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양쪽에서 40단위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자. 
‘앨리스 20x + 에릭 20x = 관계 40x’
40x라는 값은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잔인한 점은 총량을 양쪽이 똑같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양쪽이 20단위씩 노력을 내놓는 관계가 가장 합리적이겠지만, 원래 한쪽이 상대방보다 더 많이 노력하기 마련이다.
(374p)

 

 

 

 

마르크스
피터 싱어 저
3.0/5.0


사상 검증: 저는 공산당이 싫어요.

“철학은 그것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고백: (…) 간단히 말해 내 선행을 부당하게 악으로 갚는 모든 신들을 나는 증오한다. 이것은 최고의 신성으로서 인간의 자기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신들에 대한 철학 자신의 고백이며 선언이다. 어떤 것도 자기의식과 나란히 존재할 수 없다”
(43p)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세계의 억압과 무정함에 대한 대응이되 부적절한 대응으로 묘사한다. 억압 자체에 도전하지 않고 그저 고통을 잊게할 뿐이기 때문이다.
(55p)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활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이 세 가지 소외는 네번째 소외로 이어진다. 노동자에게 생산 활동은 “다른사람의 지배, 강제, 질곡 아래에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활동”이 되며 이 다른 사람은 낯설고 적대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사랑과 신뢰가 거래와 교환으로 대체된다. 인간은 서로에게서 공통된 인간 본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치부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공통의 인간성으로부터도 소외된다.
(69p)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이 결코 노동자의 의의나 존엄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노예의 보수 개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옹호하는 것은 임금, 소외된 노동, 사적 소유를 한 방에 철폐하는 것, 한마디로 공산주의다. 그가 공산주의를 소개하는 글은 헤겔풍 서사시의 마지막 장을 방불케 한다.
“공산주의는 (…)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이다. 이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자신을 이러한 해결로서 알고 있다.”
(70p)

“유산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똑같이 인간의 자기소외를 나타낸다. 그러나 전자의 계급은 이러한 자기소외 속에서 안락함과 힘을 느낀다. 유산 계급은 소외를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인식하며 그 속에서 인간적 존재의 ‘본질’을 찾는다. 그러나 후자의 계급은 이러한 소외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비인간적 존재의 실체를 본다.”
(75p)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83p)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에서 인간이 소외의 상태에 있다고 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생각, 사상,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결정하는 힘에 종속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인간이 스스로 이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힘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힘은 영원히 인간의 통제력 바깥에 있는 초자연적 폭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산력이다.
(84p)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라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의 근본적 형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한느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103p)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위의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솟아 있다면, 그 집은 오두막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 문명의 행로 속에서 그 작은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그 궁전이 동일한 정도로 혹은 더 큰 정도로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사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더욱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짓눌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13p)

자본주의하에서 대다수의 인구는 인간 자유의 이 잠재적 증가를 누리지 못한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는 계급으로서의 자본가에 비해 낮은 지위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굶주려야 하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에서 잉여 가치를 짜낼 수 있는 조건하에서만 그들을 고용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잔인하거나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한 경제 법칙이 자유 경쟁을 통해 자본가 개개인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126p)

마르크스는 공정한 분배 원칙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낡아빠진 잡소리”로 치부하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는 자본주의적 분배야말로 유일하게 “공정”한 분배임을 기꺼이 인정했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 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타 강령 초안 비판의 이 구절에서 마르크스의 목표는 “공정한 분배”와 “평등한 권리”같은 교리를 당에 강요하는 것이 나쁜 짓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147p)

한 세기 넘게 지난 뒤 마르크스의 예언은 대부분 명백한 오류로 드러났다. (…) 산업 국가에서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최저 생계비를 훌쩍 뛰어넘어 인상되었다. 이윤율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오르내리지만, 마르크스가 예언한 장기적 하락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여러 번 위기를 겪었으나 그 어디에도 내부 모순 때문에 무너지거나 전복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산업이 발전한 나라가 아니라 덜 발전한 나라에서 권력을 차지했다.
(154p)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업적은 시대를 초월한다 (…) 자유는 마르크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의 사상을 따른다고 천명한 정권들을 보면 역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마르크스의 자유 관념이 지닌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정부의 자유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적 자유 관념과 대조하는 것이다. 이 자유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나는 타인의 의도적 간섭을 받지 않는 한 자유롭다. 나의 자유를 정당하게 제한할 수 있는 경우는 만인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서 뿐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극대화되려면 모든 개개인이 타인의 의도적 간섭을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156p)

마르크스는 대다수 노동자가 봉건제의 농노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원과 기술의 물리적 한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개개인의 선택이 누적된 결과가 누구도(심지어 자본가도) 선택하지 않은 사회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자유관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우리가 타인의 의도적 간섭을 받지 않기에 자유롭다고 말할 테지만 마르크스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경제적 현실을 통제할 수 없기에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자기 사회의 경제적 관계에 대해 개인적 책임이 없으며 노동자 못지 않게 이 관계의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59p)

1975년이 되자 유럽과 미국에서 경제 성장이 느려지고 상속세가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할 정도로 인하되었으며 불평등 추세가 금세 재개되었다. 피케티에 따르면 우리는 마르크스 시대에, 심지어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 팽배했던 불평등 수준으로 돌아가고 있다. 재산을 물려받거나 부유한 배우자를 찾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경제 전략이던 시절 말이다.
(181p)

..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피케티의 공통분모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최저 생계비를 초과하는 노동자의 임금 상승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케티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최저 생계비보다 훨씬 높음을 아고 있으며 더디기는 하지만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 때문에 혁명으로 전복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영영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184p)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으로 인해 산업국들이 혁명을 늦출 수 있을 것임을 마르크스가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산업국의 대다수 노동자가 개발도상국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부터 혜택을 입기 때문이고 주장한다.
(…)
국제 구호 단체 옥스팜은 2017년에 벌인 캠페인에서 전 세계 최고 부자 8명의 재산이 전체 인구 중 가난한 절반(36억명)의 재산과 맞먹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극단적인 불평등은 분명히 불공평해 보이지만, 불평등만 놓고 보면 최고 8명이 세계의 가난한 절반이 더 가난해지도록 함으로써 재산을 벌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이 억만장자들은 제품을 발명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 공장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일자리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제품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저개발국 농촌 지역의 소농들은 휴대폰으로 얻은 정보를 가지고서 농작물 가격을 더 잘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억만장자 8명이 훨씬 해로운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확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게 되었는지 못살게 되었는지 판단하려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188p)

좌파는 자선 단체를 지원할 게 아니라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경제 질서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고방식에는 두 가지 근본적 결함이 있다. 첫째, 지구적 경제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둘째, 자본주의보다 나은 결과를 현실에서 가져올 것으로 확인된 체제를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