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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쩝/잡담

최근 읽은 비개발 도서들 짧은 리뷰(3)

 

 

요즘 공부 안하나요?

아뇨 블로그에 올리기 귀찮아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저
평점 ?/5

한줄평 : 직관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직 내가 읽을 책은 아닌 걸로.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거대한 밀물의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지만, 그대들 내면에는 많은 것이 여전히 벌레다. 그대들은 일찍이 원수잉였고, 지금도 인간은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그대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도 식물과 유령의 불화이자 잡종에 지나지 않는다.
(19p)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친구여,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그대가 말하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악마도 지옥도 없네.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몸보다도 더 빨리 죽을 것이니,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게!”
그 사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대가 진리를 말한다면, 내가 생명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을거요.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이 매질과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춤을 가르친 짐승과 다를 바 없소,”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렇지 않네, 그대는 위험한 일을 천직으로 삼았네. 그건 조금도 경멸할 일이 아니네. 그대는 이제 그대의 천직 때문에 파멸할 것이네. 그러니 내 손으로 그대를 묻어주겠네.”
(31p)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게으름뱅이 독자들을 미워한다.
독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독자를 위해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백 년의 독자라면, 그 정신 자체는 악취를 풍길 것이다.
누구나 읽는 것을 배워도 된다면 결국에는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 자체도 썩고 말 것이다.
(72p)

용감해져라, 개의치 마라, 조롱하라, 난폭하라. 지혜는 우리가 이러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인이다. 그리고 언제나 전사만을 사랑한다. 그대들이 내게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자부심을 지녔다가 저녁에는 체념하는가?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게 그처럼 다정한 체하지 마라!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잘 지는 귀여운 수나귀들이고 암나귀들이 아닌가.
(74p)

다른 사람들은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만 살도록 하라! 고통일 뿐인 삶을 그만두도록 하라!
(82p)

국가는 모든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 괴물은 냉혹하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 괴물의 입에서는 “나, 국가는 민족이다.”라는 거짓말이 기어 나온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족을 창조하고, 그 민족 위에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사랑을 걸어놓은 자들은 창조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삶에 이바지했다. 많은 사람을 낚을 덫을 놓고는 그 덫을 국가라고 부르는 자들은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그 덫 위에 한 자루의 칼과 백 가지의 욕망을 걸어놓는다.
..
그러나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한 온갖 말로 사람들을 속인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국가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훔친 것이다. 국가에 관한 모든 것이 가짜다.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국가는 훔친 이빨로 물어뜯는다. 심지어 그의 내장조차 가짜다.
선과 악에 대한 언어 혼란, 내가 그대들에게 알려주는 징표가 국가의 징표다.
(90p)

그대의 말 없는 자존심은 언제나 그들의 취향에 거슬린다. 그러므로 그대가 헛될 만큼 겸손하면, 그들은 기뻐 날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 그것은 그에게 불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러니 소인배들을 조심하라!
..
달아나라,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거친 바람이 사납게 불어오는 곳으로! 파리채가 되는 것, 그것은 그대의 운명이 아니다.
(98p)

그대는 젊고,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아이를 원해도 될 만한 인간인가?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승리한 자, 자기를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아니면 그대의 소망에는 짐승과 절박한 욕구가 들어 있는가? 아니면 고독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
나는 그대의 승리와 그대의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란다.
(130p)

이제 나 홀로 가려고 한다, 나의 제자들이여! 그대들도 이제 헤어져 홀로 가도록 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진실로 그대들에게 권한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그리고 더 바람직한 것은 차라투스트라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그대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인식하는 인간은 적을 사랑할 뿐 아니라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 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게서 월계관을 잡아채려 하지 않는가?
(146p)

신은 모든 곧은 것을 구부리고, 서 있는 모든 것을 비틀거리게 하는 사상이다. 무슨 말이냐고?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덧없는 모든 것은 한갓 거짓이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온몸이 소용돌이치며 어지럽고, 위장은 구역질을 일으킨다. 참으로 이러한 일을 억측하는 것을 나는 어지럼병이라 부른다.
하나인 것, 완전무결한 것, 움직이지 않는 것, 충만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 모든 가르침. 이것을 나는 사악하고 인간 적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불멸하는 모든 것, 그것은 오직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시인들은 너무도 많은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최선의 비유라면 마땅히 시간과 생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덧없음을 찬양하고 정당화한다.
(158p)

가장 나쁜 것은 하찮은 생각이다. 하찮은 생각을 하느니 악행을 저지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낫다.
물론 그대들은 “하찮은 악의에서 느끼는 기쁨이 많은 커다란 악행을 예방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방을 바라서는 안 된다.
악행은 궤양과 같다. 악행은 가렵고 긁게 만들다 결국 터져나온다. 악행은 이처럼 정직하게 말한다.
악행은 “보라, 나는 질병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행의 정직함이다.
그러나 하찮은 생각은 진균과 같다. 기어다니고 움츠리고 어느 곳에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한다. 온몸이 작은 진균 때문에 썩어 문드러지고 시들 때까지.
(163p)

그대들 덕이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아직도 대가를 바라는구나!
덕에 대한 대가를,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대가로 천국을, 그리고 그대들의 오늘에 대한 대가로 영원을 바라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자도 보수를 줄 자도 없다고 가르쳐서 내게 화를 내는 것인가? 참으로 나는 덕이 덕 자체의 대가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171p)

나의 벗들이여, 충고하건대 남을 처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라면 누구든 믿지 마라!
그들은 종족과 혈통이 비천한 족속이라, 그들의 얼굴에는 사형집행인과 수색견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말을 많이 하는 자라면 누구든 믿지 마라! 참으로 그들의 영혼에 결핍한 것은 꿀만이 아니다.
그들이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를 때, 권력만 없을 뿐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나는 이런 평등의 설교자들과 섞이거나 혼동되고 싶지 않다. 정의가 내게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선과 악, 부와 빈곤, 고귀함과 비천함, 그리고 모든 가치의 이름들. 이것들은 무기가 되어야 하며, 삶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덜거덕거리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삶은 기둥과 계단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높은 곳에 세우려고 한다. 삶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행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삶에는 높이가 필요하다!
(184p)

‘그러했다.’ 이것은 의지가 이를 가는 소리이며 더없이 고독한 슬픔의 이름이다.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 무기력한 의지는 모든 과거에 대해 악의적인 방관자다.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욕할 수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더없이 고독한 슬픔이다.
(..)
그 모든 ‘그러했다’는 파편이자 수수께끼이고 끔찍한 우연이다. 창조적 의지가 그것에 대해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고 말할 때까지는.
창조적 의지가 그것에 대해 ‘그렇게 되기를 내가 원한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원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는.
(237p)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러한 준언함이 필요하다.
인식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어떻게 만사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겠는가.
(277p)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들 군중 사이를 지나간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덕을 질투하지 않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물어뜯는다. 소인배들에게는 왜소한 덕이 필요하다고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소인배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낯선 농가에 있는 수탉과 같다. 암탉들조차 그 수탉을 쪼아대지만, 나는 이 암탉들을 언짢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자잘한 짜증 나는 일들에 대해 그러하듯 암탉들에 대해서도 공손하다. 왜소한 것에 대해 가시 돋쳐 발끈하는 것은 고슴도치에게나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
(303p)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낼 시간은 없어.” 그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낼 ‘시간이 없다’고 할 때 그 시간이란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들이 나를 찬양한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그들의 찬양 위에 누워 잠들 수 있겠는가? 내게는 그들의 칭찬이 가시 박힌 허리띠와 같다. 그 허리띠는 풀어놓아도 나를 할퀸다.
나는 그들에게서 이것을 배웠다. 칭찬하는 자는 돌려주는 것처럼 꾸며대지만, 사실은 더 많이 받기를 바란다!
(305p)

선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그만큼의 약점을 본다. 정의와 동정이 있는 곳에서 나는 그만큼의 약점이 있음을 본다.
그들은 서로 둥글둥글 잘 지내고 정직하고 친절하다. 마치 작은 모래알들이 다른 모래알들과 둥글둥글 잘 지내고 정직하고 친절하듯이.
작은 행복을 겸손하게 얼싸안는 것, 이것을 그들은 ‘순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새로운 작은 행복을 향해 겸손하게 곁눈질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한결같이 단 한 가지만을 원한다. 이는 누구로부터도 고통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모두에게 친절을 배푼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함이다. 이미 그것이 덕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307p)

참으로 나는 모든 사물이 선하며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고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을 나는 전적으로 만족한 자라고 부른다.
모든 것의 맛을 볼 줄 아는 완전한 만족감. 이것이 최선의 취향은 아니다! ‘나’와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아주 반항적이고 까다로운 혀와 위장을 나는 존경한다.
모든 것을 씹고 소화하는 것은 진정 돼지의 속성이다! 언제나 ‘la’라고 외치는 것, 그것은 나귀와 나귀의 정신을 가진 자만 배운다!
(350p)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것이 이제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가야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52p)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런데 창조하는 자는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그 의미와 미래를 부여하는 자다. 이 창조하는 자가 비로소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정한다.
(354p)

고귀한 영혼의 기질은 이렇다. 그러한 영혼은 아무것도 거저 얻으려 하지 않으며, 삶은 특히 그러하다.
천민의 부류는 거저 살려고 한다. 그러나 삶이 스스로를 내맡긴, 그리하여 저들과 다른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가장 잘 보답할 수 있는가를 언제나 깊이 숙고한다!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 그것을 우리는 삶에게 지키고자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고귀한 이야기가 된다.
(359p)

선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정신에게 그 정도로 선하다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그들, 이 선한 자들은 양보하고 참고 견딘다. 그들의 마음은 남을 따라서 말하고, 그들의 바닥은 복종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려면 선한 사람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둔 것이 함께 모여야 한다. 아,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러한 진리에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악한가?
대단한 감행, 오랜 불신, 잔인한 부정, 권태, 살아 있는 것 속으로 파고들기. 이런 것들은 얼마나 드물게 함꼐 모이는가! 그러나 이러한 씨앗으로부터 진리는 태어난다!
(360p)

그대들은 증오할 만한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그렇게 가르친 적이 있다.
좀 더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려고, 아, 나의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많은 것을 그냥 지나쳐야 한다. 
특히 그대들의 귀에 군중과 군중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많은 천민의 곁을 지나쳐야 한다.
그들의 찬성과 반대 앞에서 그대들의 눈을 맑게 유지하라! 거기에는 올바름도 많고 그릇됨도 많다.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화가 나기 마련이다.
들여다보는 것과 칼로 베는 것, 그것은 여기서 같은 행위다. 그러므로 숲속으로 들어가서 그대들의 칼을 잠자게 하라.
(376p)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이것을 내게서 배워라. 시장에서는 아무도 우월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거기서 말하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빡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라고.
천민은 눈을 깜빡이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우월한 인간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천민 앞에서 우리는 평등해지고 싶지 않다.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시장을 떠나라.
(503p)

그대들 부류 가운데서 더 많은 사람이, 더 뛰어난 자들이 파멸해야 한다. 그대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고 더욱 가혹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래야만, 오직 그래야만 인간은 번개에 맞아 부서질 정도의 그 높이로 성장한다. 번개를 맞기에 충분한 높이로!
나의 마음과 나의 동경은 드문 것, 장구한 것, 머나먼 것을 향한다. 그대들의 작고 많은 짧은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507p)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이 ‘무엇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버려라. 그대들의 덕은 그대들이 바로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목표로’, 무엇 ‘때문에’ 어떤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거짓되고 하찮은 말들에 대해서 그대들은 귀를 막아야 한다.
‘이웃을 위해서’는 오직 왜소한 자들만의 덕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유유상종’이라든지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라는 말이 통한다. 그들은 그대들의 이기심을 누릴 권리도 힘도 없다.
(…)
그대들의 일, 그대들의 의지가 그대들의 ‘이웃’이다. 거짓 가치에 설득당하지 마라!
(511p)

 

 

 

파시즘
케빈 페스모어 저
평점 2.5/5.0

한줄평 : 다소 편향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읽을만 함.


파시즘은 스킨헤드에게도, 지식인에게도 호소력을 가진다. 혁명을 부르짖지만 보수주의자들과도 손을 잡는다. 마초 스타일을 구사하지만 많은 여성의 호감을 산다. 전통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한편 과학기술에 환호한다. 국민을 이상화하면서도 대중사회를 경멸한다. 폭력과 질서를 동시에 옹호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르테가이 가세트가 말한대로, 파시즘언 언제나 A이면서도 A가 아니다. 
(20p)

파시스트들이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약화하기 위해 인종주의를 이용했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예컨대 독일에서 정신질환자들을 살해한 것이나 남티롤 지방 주민에게 이탈리아계 성씨를 강요한 것마저도 자본가를 보호혀라는 조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마도 파시스트들은 자본주의 논리와 무관한 이유로 영토 확장과 인종 주의를 추구했을 것이다.
(29p)

베버주의자들은 사회적 변화가 유달리 급격하게 진행될 때, 즉 근대화나 전쟁, 혹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전통적 방식이 무너질 때 대중이 파시즘에 취약해진다고 주장한다. 익숙한 삶의 방식이 와햐되면서, 전통에 믿음을 둔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며, 잃어버린 확실성을 되찾아주겠노라 약속하는 파시스트들에게 의지한다. 근대화의 희생자들에게, 파시즘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시한다. 변화의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 소재를 지목하며, 근대 이전의 전체주의적 유토피아를 복원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30p)

전체주의 이론에 따르면, 전체주의 권력은 모든 대안적 연대를 파괴하여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꿈의 실행은커녕, 밑그림을 그리는 것부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불가능한 수준의 객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근본벅인 문제들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게다가 유토피아에 대한 그들의 비전과 그것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 자체가 편견과 무의식적 가정의 산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상정한 동원국가 체제에서 대기업과 가족은 설 자리가 있었고,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은 그렇지 못했다.
(38p)

얼마나 많은 개인이나 운동, 정권을 파시즘이라는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가는, 파시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우리가 파시즘을 단순히 대중을 조종하려는 욕구, 혹은 독재라고 정의한다면, 상당히 많은 수가 파시즘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 거기에 인종주의, 그리고 혹은 반 유대주의라는 기준을 더한다면 해당 범위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어느 한 가지 정의에 합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정한 파시즘을 특정한다고 해도 그 판단이 결코 단정적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137p)

전체주의라는 개념에 비추어보면, 보수 진영과 파시스트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보수주의는 교회나 관료, 군, 혹은 군주에 의한 통치를 지지하며, 가족과 사유재산을 보호한다. 반면에 파시즘은 대중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부상과 이들이 이끄는 대중 정당을 전제로 한다. 파시즘은 보수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제도나 관습을 위협하며, 그런 점에서는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138p)

“ur-facism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그것은 때로 제복이 아닌 평범한 사복 차림이다. 누군가 ‘아우슈비츠를 다시 세워야겠다’거나 ‘검은 셔츠단이 다시 이탈리아의 광장을 행진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면,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르-파시즘은 더없이 무고한 모습을 가장하여 되돌아오곤 한다. 우리의 책무는, 날마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에서든, 우르-파시즘을 폭로하고, 새로운 사례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규탄하는 것이다.”
(172p)

그 누구도, 국경 맞은편에 사는 사람들의 차이점이 ‘심층 심리’나 유전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증명해 보인 적이 없다. 민족의 지리적 경계란 대개 왕과의 우연한 사고나 전쟁에서의 승패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던가. 또한, 그 누구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미세한 유전적 차이가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입증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한 민족 안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은 민족들 사이의 차이점들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크다.
(..)
어떤 이들은 영국인들과 아일랜드인이 서로 다른 인종이라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러한 견해차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체계화된 편견에 불과하다.
(225p)

극우와 파시즘 사이에는 분명히 많은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극우를 파시스트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극우가 내포한 위험에 주목해야 하며, 동시에 비파시스트 운동 역시도 건전한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가치의 문제는 비단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답해야할 문제다.
(263p)

 

 

 

 

철학의 역사
나이절 워터번 저
평점 3.0/5.0

한줄평 : 전반적으로 찍먹하고 흐름 읽기 좋음


피론의 대답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첫째, 우리는 세계가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아무도 실재의 궁극적인 속성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그런 지식을 습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잊어버리자.
(..)
둘째, 그 결과 우리는 어떤 견해도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욕망은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는 데서 시작된다.불행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나은지를 알 수 없다.
(..)
셋째, 만약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시작부터 말문이 막힐 것이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이다.
(33p)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상이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행운과 불행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마치 날씨처럼 생각하지만, 그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단순히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우리가 꼭 슬퍼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속일 때 반드시 화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이 추론을 흐리고 판단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해야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46p)

물속에 들어 있는 곧은 막대기는 옆에서 보면 구부러져 보인다. 멀리 있는 사각형 탑은 둥글게 보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가끔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실수를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과거에 우리를 속인 어떤 것을 다시 믿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감각을 확실성의 잠재적 출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아마도 보통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감각에 완전히 의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93p)

하지만 결정론자였다고 해도 스피노자는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 인간의 자유가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최악의 존재 방식은 그가 ‘예속’이라고 부르는 것, 즉 감정에 완전히 휘둘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쁜 일이 벌어지고 누군가가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 때 화를 참지 못하고 증오가 가득 차면 이것은 아주 수동적인 존재 방식이다.
단순히 사건들에 반응한 것이다. 당신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외적인 사건들이다. 당신히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을 피하는 법은 행동을 구체화시킨 원인들, 즉 당신을 화나게 만든 것들을 좀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선은 우리의 감정이 외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선택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해도 수동적인 것보다는 능동적인 편이 낫다.
(113p)

칸트는 감정이 도덕성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지 아닌지는 대체로 운의 문제이다.
동정심과 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성격이 비열해서 관대한 마음을 갖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돈과 재산을 기부하는 데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청년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알아서 그렇게 한다면 칸트가 보기에 그것은 도덕적 행위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옳은 일이다.
(159p)

밀은 더 커다란 행복은 행동의 자유가 더 많은 개인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밀이 우려한 것은 국민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정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드이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것을 못하게 사회적 압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싫어했다.
밀은 그것을 ‘다수의 횡포’리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개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당신의 삶에서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그들보다 당신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비록 당신이 잘 알지 못해도 한 가지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하기보다 우리 각자가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더 낫다고 밀은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공리주의 사상과 일치한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보다 확대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더 많은 행복을 산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4p)

소설가이자 실존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는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이용해서 인간의 부조리를 설명했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바위는 굴러 내려가고 시시포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시시포스의 노역과 같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을 설명해줄 답도 전혀 없다. 부조리하다.
하지만 카뮈는 우리가 절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살해서는 안 된다.
대신 시시포스가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왜 행복할까? 거대한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노고에는 그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훨씬 낫다.
(269p)

사르트르가 말하려 했던 것은, 이를테면 주머니칼과 달리 인간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르트르는 우리를 설계했을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머니칼은 자르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이 주머니칼을 주머니칼로 만드는 본질이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을 하도록 설계되었는가?
인간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 특별한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무엇을 할지, 무엇이 될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다.
당신이 아닌 어느 누구도 당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살것인지 결정하게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다.
(264p)

포퍼가 보기에 어떤 가설이든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반증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발상을 이용해서 과학과 그가 ‘유사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과학적 가설은 잘못이라고 입증될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 예측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요정들이 있어서 내가 이 문장을 타이핑하도록 시킨다’라고 말한다면 내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관찰은 없다.
요정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요정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
그것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전혀 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다.
(290p)

그녀는 선로에 있는 다섯 명의 노동자를 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다른 경우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관심이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 병동으로 걸어 들어온다고 상상해보자. 이 병동에는 저마다 장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
(…)
건강한 사람을 죽이고 해부해서 건강하지 못한 다섯 사람에게 장기를 제공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건강한 한 사람을 죽여서 심장, 폐, 간, 신장을 적출하고 그것을 다섯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이 용납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한 명을 희생하여 다섯 명을 구하는 경우이다. 폭주하는 열차의 경우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2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