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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쩝/잡담

최근 읽은 비개발 도서들 짧은 리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5.0/5.0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129p)

그녀는 이 체험을 프랑스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점령당한 너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야?”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170p)

서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직까지도 고민하는 이유가 뭘까? 그의 모든 결심 기준은 하나뿐이다. 테레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 것. 토마시는 정치범은 구할 수 없었지만 테레자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 아니다, 그것조차도 그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탄원서에 서명한다면 경찰이 더욱 자주 그녀를 괴롭히러 올 것이며 그녀의 손은 더욱 심하게 떨릴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보다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꺼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요.”
그는 이 말이 이해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졌다.
(359p)

신학적 예비 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 따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세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400p)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였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492p)

'여기 카레닌이 쉬고 있다. 그는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500p)

춤을 추면서 그녀는 토마시에게 말했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하고 토마시가 반박했다. “밑바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취리히에 있었다면 당신은 환자들을 수술했겠지.”
“당신도 사진사 일을 했겠지.”
“비교할 수 없어. 당신에게 의사 일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했지만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상관 없어. 나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는데.”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516p)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5.0/5.0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 스토리다.
(28p)

만일 결혼이 실패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함께 파멸한다. 결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암시하는 목소리들이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옳다고 라비도 수긍하지만, 거기에는 위험의 정서적 호소력, 즉 줄거리에서 단 몇 번만 틀어져도 공멸을 피할 수 없는 경험 속으로 연인과 함께 뛰어드는 매력이 없다. 라비는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파멸도 하겠다는 자신의 태도를 헌신의 증거로 간주한다.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p)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욕실 관리를 두고 꼬박 이틀간 정상회담을 하는 건 너무 유별나고, 저녁 약속을 위해 집에서 정확히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를 정하기 위해 전문 중재인을 고용하는 건 분명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76p)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123p)

라비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뒤죽박죽이고 종잡을 수 없다는 걸 감지할수록, 제도로서의 결혼이라는 관념에 더욱더 공감한다. 콘퍼런스에서 그는 매력적인 여자를 염탐하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까 고민했을지 몰라도 결국 이틀 후에는 커스틴이 없으면 죽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혹은 계속 비가 오는 주말에는 아이들이 빨리 커서 그가 평온하게 잡지를 읽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그를 혼자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루 지나 사무실에서는 회의가 길어져 퇴근 후 아이들을 재우는 시간이 한 시간 늦어질 것 같으면 비통함에 가슴이 조여오곤 했다.
(243p)

"미안해요, 스포프 씨. 내가 항상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못 되어줬어."
그가 그녀의 드러난 팔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훌륭했지."
그들은 함께 이뤄온 것에 황홀한 충성심을 느낀다. 다투게 되고 화나고 웃음 나고 어리석은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것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290p)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한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고, 커스틴은 그가 부주의하게 저지른 일에 성마르게 한마디 내뱉고, 그는 직장에서 직면할 힘든 문제들을 떠올리고는 두렵고 지루하고 망친 것 같고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293p)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3.5/5.0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115p)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141p)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71p)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얻은 행복,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깊은 철학적 숙고 뒤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하여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 행복은 위험했다. 자족적인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몇 달 동안 꾸준히 연구한 끝에 원자생물학계를 뒤흔들 과학 공식을 발견했다면, 나는 그 발견에 뒤따르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182p)

우리가 서로에게 지독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 그럼에도 사실 그 비난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싸웠음을 보여준다.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싸운 것이다. 우리의 비난에는 복잡한 이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너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릎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는 기쁨은 그런 의존에 수반되는, 몸이 마비될 듯한 두려움에 비교하면 빛이 바랜다.
(181p)

사랑의 죽음의 피해자는 시신을 되살리려고 하지만 독창적인 전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독창성만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두려움에 빠졌고, 따라서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노스텔지어에 젖어버렸다. 나는 클로이가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과거에 우리를 붙여놓았던 요소들을 맹목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고 했다. 나는 계속 키스를 했다. 그 이후 몇 주 동안 우리가 즐거운 저녁을 함께 보냈던 영화관이나 식당에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우리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던 농담을 다시 했고, 우리의 몸들이 엉켜서 만들어냈던 자세를 다시 채택했다.
(195p)

나는 그녀의 짜증을 돋우는 존재가 되었다. 상대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책을 사다주었고, 그녀의 재킷을 세탁소에 맡겼고, 저녁 값을 냈고, 크리스마스에 우리의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파리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을 거슬러 사랑을 할 때 돌아오는 결과는 모욕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우울하게 할 수 있었고, 나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고, 나를 무시할 수 있었고, 놀릴 수 있었고, 속일 수 있었고, 때릴 수 있었고, 찰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대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197p)

정신분석만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무작위적이라는 생각으로부터 거리가 먼 철학은 없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고, 그러다 클로이가 떠난 것이 아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도록 그녀를 사랑했다.
(231p)